Inside Chaeg: Design 책 속 이야기 디자인

허구적 현실의 조용한 조력자,
TV 속 세트 디자인

에디터: 유대란
사진: 두성북스 제공

매일 보지만 굳이 관심을 두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곳, 어딘지 익숙하지만 결코 가본 적 없는 공간, 화려하지만 지속될 수 없는 환상. 텔레비전 속 세트다. 텔레비전을 끼고 사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한 번쯤은 세트에 어떤 생각이 담겼는지 궁금해한 적이 있을 것이다. 20년째 세트 디자이너로 활동해온 미술감독 양승헌이 우리의 이런 호기심에 응답해준다.

텔레비전 화면 속 세계는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환상을 부추기고, 때로는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세계를 비춰준다. 텔레비전 속 인물이 시청자를 대신해서 인생의 모든 성공의 열쇠를 거머쥐는 순간 우리는 같이 기뻐하고, 주인공이 현실보다 더 냉혹한 좌절 앞에 무릎을 꿇을 때는 애써 유지하고 있던 화면과 현실 간의 거리를 날름 건너뛰어 공감에 빠져든다. 시청자가 화면 속 환희와 좌절에 자신을 대입할 때 텔레비전 속 세트는 공감의 강력한 조력자가 된다. 세트는 거기 있지만 없는 듯 있고, 빼어나지만 인물을 압도하지 않으며, 현실적이지만 현실이 되면 안 되는 다중적인 요구를 충족시킨다.

드라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퀴즈쇼의 참가자가 경쟁에서 낙오한 후 세트를 퇴장한 이후에야 그가 서 있던 자리의 화려함을 깨닫는다. 그곳은 화려하지만 지속될 수 없는 환상이고, 현실만큼 각박하고 긴장된 순간들이 벌어지지만 진짜 현실을 상기시켜서는 안 되는 공간이다. 세트 디자인의 세계는 이토록 까다롭고도 매혹적이다.
세트는 TV 촬영의 배경이 되는 벽체나 구조물을 뜻한다. 장치나 대도구라 불리기도 한다. 세트를 디자인하는 일은 단순히 세트만 설계하는 일이 아니다. 세트는 연희(演戱)의 터전으로서 연출자의 의도를 보조하거나 강조하는 장치가 되고, 연기를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세트 디자이너는 소품, 의상, 조명 등의 시각요소를 함께 고민해야 하는 미술감독의 역할을 병행하기도 한다.

동시에 그는 설계자다. 그가 그리는 선은 벽이 되어 연기자의 동선을 구축하고, 막아서기도 하며, 스태프와 장비를 감춰준다. 고심 끝에 그려 넣은 기둥 하나가 감정을 일으키는 표상이 되기도 하고 우연히 뚫어놓은 개구부가 연출자의 심미적 시점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세트는 연출, 미술, 촬영, 기술 등 거의 모든 분야 인력의 사고와 움직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세트 디자이너에겐 공학적 자질도 필요하다. 공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세트 디자인은 건축이나 인테리어와 유사하지만, 클라이언트의 취향이나 요구사항이 아닌, 영상물 제작의 근간이 되는 대본, 시나리오, 시놉시스, 기획안 등의 텍스트를 공간이라는 매개로 풀어낸다는 데 가장 큰 차이가 있다.

합판으로 만드는 인문학
20년째 세트 디자이너로 일해온 양승헌 미술감독은 이런 세트의 성격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전문가다. 그는 드라마, 예능, 교양, 보도 등 160여 편에 달하는 프로그램의 미술 제작에 참여했다. 오랫동안 세트 디자이너로 살면서 그가 느낀 것은 세트 디자인에서 예술적 감각이나 설계능력 못지않게 필요한 것이 문해력과 문학적 감수성이라는 점이다.
세트의 사용자는 연출자와 연기자지만, 세트 디자이너가 개입하기 전까지 기획안이나 대본은 그저 텍스트이며 연출자의 의도 역시 실체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텍스트를 구체화하려면 당연히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문학적 감수성이다. 그것이 영상물의 ‘내러티브’를 파악하게 해주고 나아가 내러티브의 완성을 위해 미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거기서 세트의 콘셉트가 출발하는데 텍스트를 읽고 행간에 숨어 있는 상징과 암시를 분석해 공간의 구조, 세트의 형태, 색채 등을 정한다. 콘셉트는 곧 디자인의 줄기가 되고, 줄기가 탄탄하면 나머지 과정은 매끄럽게 진행된다. 문학적 감수성이 동반해야 하는 건 보편성이다.
“단지 자신만의 경험이나 취향이 아닌 연출자나 시청자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도 일반적인 사고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엔 많이 알고 많이 봐야 합니다. 인식체계는 개인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합니다. 경험과 지식이 부족하면 완성물은 척박하기 마련입니다. 저는 가끔 세트 디자인이 합판으로 만드는 인문학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문학은 사람을 향합니다. TV란 매체 역시 늘 사람과 세상을 이야기합니다. 세트가 그런 영상물을 담는 그릇이라면 그것을 설계하는 디자이너 역시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004_article_inside_02
Please subscribe for more.